--- 준경묘 비음기 (濬慶墓) ---

    三陟治之西四十里에 有曰蘆洞山하니 白頭陀以來로 局勢雄偉하고 形如伏虎하여

    삼척치지서사십리   유왈노동산       백두타이래   국세웅위      형여복호

    負辛而向乙은 卽我穆祖皇考衣履之攸藏也라 고상신허穆이 爲府使時所箸州誌序와

    부신이향을    즉아목조황고의리지유장야   고상신허목    위부사시소저주지서

    及蘆洞山의 二墓記에 備述古蹟하니 其言宣廟時에 東伯鄭澈이 圖上墓地하여

    급노동산    이묘기   비술고적       기언선묘시    동백정철   도상묘지

    請修築事甚詳하니 許鄭은 皆名臣也라 所言이 皆確據리라 國初에 陞郡爲府하고

    청수축사심상      허정    개명신야    소언   개확거       국초    승군위부

    賜犀帶하여 藏之府司하고 列聖朝 令道臣하여 年例奉審하고 禁養守護하니

    사서대      장지부사       열성조 영도신      년례봉심      금양수호

    俱有文獻可考라 惟 朕小自 嗣服之三十有六年己亥에 견재臣 李重夏하여 奉審하니

    구유문헌가고    유 짐소자 사복지삼십유육년기해    견재신  이중하     봉심

    輿舊傳圖誌로 皆驗이라 仍令定界立標하니 東至基谷하고 西支主峰後하며 南支

    여구전도지    개험      잉령정계입표      동지기곡       서지주봉후      남지

    沓谷하고 北支稷谷이라 以量地尺으로 裁之하니 各三千三百이라 立祭閣하고

    답곡       북지직곡      이량지척      재지       각삼천삼백      입제각

    置官員守直하여 俎豆之儀를 一依各墓例而行歲一祀之禮하니 嗚呼라 列聖朝 追遠

    치관원수직      조두지의    일의각묘례이행세일사지례      오호    열성조 추원

    奉先之節이 靡不用其極而迄有未遑은 愼之至也라 竊惟列聖朝 所以屢致愼焉者를

    봉선지절    미불용기극이흘유미황   신지지야    절유열성조 소이누치신언자

    今可以遵奉爲金石하니 庸是而有擧는 盖所以繼術者而 亦不勝曠感于是焉하노라

    금가이준봉위금석      용시이유거    개소이계술자이 역불승광감우시언

    高宗 御製

    고종 어제

     

    --- 해   역 ---

     

    강원도 삼척군의 서편 40리에 노동산이 있으니 두타산에서부터 내려와 산세가 웅장하며 엎드린 범의 모습과도 같다. 여기에 신좌 을향하고 있는 산소는 바로 우리 목조대왕 아버님의 묘소이다.

     

    옛 정승 허목이 삼척부사로 재임 시 저술한 주지(州誌) 서문. 노동 동산 두 산소 기록에 의해 고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선조때에 강원감사 정철이 산소의 지도를 그려 올려서 수축하기를 청한 사실이 너무도 자세하다” 허목, 정철 두 사람은 모두 이름 높은 신하들로 말한바가 확실한 증거에 의하였다.

     

    국초에 君을 府로 승격 시키고 금관 옥대를 삼척 원에게 내려 주어 간직케 하고 여러 성조께서도 도백에게 하명하여 연례로 보살피게 하고 벌목을 금하여 수호케 하시니 모두 문헌으로 고증 할 수 있다.

    내 왕위를 이어 받은 지 36년에 재상 이중하를 파견하여 살펴보니 예전부터 전해오는 묘소 誌와 기록과 모두 틀림이 없는지라 이에 하명하여 경계를 정하여 포목을 세우고 동쪽은 기곡까지, 서쪽은 주봉의 후면까지, 남쪽은 답곡까지, 북쪽은 직곡까지, 측량해 보니 각기 길이가 3,300자 이다.

     

    제각을 짓고 관원을 두어 지키게 하며 제사 받드는 절차는 일일이 다른 산소와 같이 하여 해마다 한번씩 제사를 봉양케 하니 아아 여러 할아버님들께서 선조를 받드는 성의와 절차가 지극하였으되 지금까지 묘의를 갖추지 못함은 삼가하는 마음이 지극하였기 때문인가 하노라. 가만히 생각건대 여러 선조께서 너무 삼가 미치지 못한 것을 이제 와서 받들어 금석에 세기노니 이 일이 선조를 계술한 것이건 마는 또한 허전한 마음을 금할 길 없도다.

    고종 36년 고종 황제 글을 짓다.

     

     

    --- 영경묘(永慶墓) ---

    自蘆洞而東十里에 有曰東山이라 距三陟治三十里하니 寔我穆祖皇妃 李氏衣履之葬也라

    자노동이동십리   유왈동산      거삼척치삼십리       식아목조황비 이씨의리지장야

    坐卯而向酉하니 山勢之雄偉는 稍遜而含抱蘊藉하니라 命之奉審한데 宰臣李重夏 所奏

    좌묘이향유      산세지웅위     초손이함포온자        명지봉심       재신이중하 소주

    邑中紀傳에 故相臣 許穆이 府史時所撰州誌序와 及蘆洞東山二墓誌의 所述古事에 東伯

    읍중기전    고상신 허목    부사시소찬주지서   급노동동산이묘지    소술고사   동백

    鄭澈이 圖上墓地하여 請修築始末과 列聖朝의 令道臣하여 年例奉심하고 禁養守護之節이

    정철    도상묘지     청수축시말     열성조    영도신     년례봉심        금양수호지절

    一如蘆洞하니 兩墓所 文獻實蹟이 一以可徵이라 東至求壽峰하고 西至方禹峙하며 南至

    일여노동      양묘소 문헌실적    일이가징      동지구수봉       서지방우치      남지

    多羅龜尾하고 北至上寺田洞口하여 各以量地尺三千三百이라 定界立標하고 墓儀制와

    다라구미       북지상사전동구      각이양지척삼천삼백      정계입표      묘의제

    置祀典은 視蘆洞하다 嗚呼라 是擧也一其於 追遠報本之義에 必不可闕焉者也라

    치사전    시노동      오호    시거야일기어 추원보본지의    필불가궐언자야

    惟 朕小子 豈敢曰式克于列聖朝 所未遑者哉리오 亦不克不圖惟成之焉이로다

    유 짐소자 기감왈식극우열성조 소미황자재      역불극불도유성지언

     

    --- 해   역 ---

     

    노동으로부터 동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동산이 있는데 삼척 고을과 거리가 30리가 되니 여기는 목조 할아버지의 어머님 이씨를 모신 산소다.

    묘가 卯좌 酉향으로 산세의 웅장함은 조금 부족하나 포용력이 있고 아늑하다.

    자세히 살펴 아뢰도록 정승 이중하 에게 명령한바 그 고을의 전설 기록과 옛 정승 허목 이 부사로 봉직할 때 지은 주지의 서문과 노동 동산 두 산소에 대한 기록에 일찍이 정철이 강원 감사로 재임 시에 묘소 지도를 그려 올려 수축을 청한 전후 사적과 여러 선조께서 도백에게 명하여 연례로 봉심하고 벌목을 금지하고 수호하는 절차가 노동 산소와 똑같이 하였으니 두 산소의 문헌이며 실적이 한결같이 확증이 된지라.

     

    동쪽으로 구수봉까지 서쪽으로 방우치까지 남쪽으로 다라구미까지 북쪽으로 상사전, 동구까지 각각 측량하니 척수가 3,300이다. 경계를 정하여 표목을 세우고 산소의 제도와 제사 받드는 절차는 노동 산에 준하였다.

     

    아 아 이일은 그 선조를 추모하는 뜻에서 반드시 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짐이 어찌 감히 여러 선조께서 미처 하시지 못한 것을 능히 했다. 하리요 또한 도모하여 이루지 않을 수 없어서 이니라.

    고종 36년 고종 황제 글을 짓다.

     

     

    --- 목조대왕 구거 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趾碑) ---

    목조대왕 구거 유지비는 1900년(광무 4) 1월 28일 고종황제에 의해 세워졌다. 전주의 오목대 에 있다. 邑誌에 보면 목조대왕 구거 유지비가 있는 자리에 목조대왕의 저택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활기동 비음기(活耆洞碑陰記) ---

    활기동(삼척) : 노동(목조의 아버지 장군공 휘 양무의 산소가 있는 산)과 동산(장군공 휘 양무의 배위 이씨의 묘가 있는 산)의 중간에 있는 마을로써 목조대왕께서 전주에서 이곳으로 이사하여 살았던 곳.

     

     

    --- 활기동 비음기 - 고종황제 어제 ---

    有洞이 介於蘆洞東山之間而道里若均曰活耆니 穆祖舊居址也라 自全州로 徙于是也에

    유동이 개어노동동산지간이도리약균왈활기    목조구거지야    자전주   시우시야

    願從而來者 百七十餘家라 傍近遺黎 宜其有餘裔언만 而無能言古事하고 惟相傳宅基宅田하여

    원종이래자 백칠십여가    방근우려 의기유여예      이무능언고사      유상전택기택전

    垣礎가 尙存이라 國初에 陞君爲府 하고 賜犀帶하여 藏之府司하니 傳以爲以 穆祖故鄕而

    원초    상존     국초    승군위부       사서대       장지부사       전이위이 목조고향이

    恐非是면 旣無所據矣로다 夫有此 異數者는 意其爲墓所 與舊基之鄕也니 尤爲可徵信者矣라

    공비시    기무소거의      부유차  이수자  의기위묘소  여구기지향야   우위가징신자의

    伐石而樹之하고 謹記其陰하여 用識先蹟하여 以昭後來云爾로다

    벌석이수지      근기기음      용지선적       이소후래운이

     

    --- 해 역 ---

     

    노동과 동산의 중간에 있어 거리가 비슷한 마을은 바로 활기동이다. 목조대왕께서 옛날에 살으셨던 터이니 전주에서 이곳으로 이사하심에 자원해서 따라오는 사람이 170여 호가 되었다 하니 그 근처에 백성들이 아마도 그의 후손일 것이련만 능히 옛일을 말해 줄 사람이 없고 오직 집터만 전해 와서 주춧돌만 남아 있을 뿐이다

     

    국초에 君을 府로 승격시키고 금관 옥대를 감사에 간직하게 했다. 전해 내려오기를 목조대왕의 고향으로서 생각건대 이런 것이 아니면 또 더욱 증거 할만한 것이 없으리로다.

    대범 이 같은 특별한 예우가 있는 것은 아마도 그 산소와 옛터가 있는 고향을 위하는 것이니 더욱 가히 증명되고 믿음직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이에 돌을 다듬어 세우고 삼가 글자를 새겨 선대 자취를 기록하여서 장래에 밝히노라.

     

     

    --- 목조대왕 기사(穆祖大王 記事) ---

    穆祖幼時에 輿群兒로 遊戱할세 驟雨猝至하여 入巖穴中避雨러니 忽有大虎하여 當岩砲哮어늘 목

    조목조유시 여군아    유희      취우졸지       입암혈중피우      홀유대호     당암포효

    群兒曰吾輩 豈盡厄哉리오 必有一人 虎欲害者라하고 各投衫試之러니 虎攫穆祖衫이어늘 群兒

    군아왈오비 기진액재      필유일인  호욕해자        각투삼시지       확목조삼            군아

    擠癰出之에 虎 漸次退後하고 穆祖 亦隨而前進 하여 距岩稍遠에 岩遂墮落하니 群兒는 豈死하고

    제옹출지    호 점차퇴후      목조 역수이전진       거암초원    암수타락       군아

    惟 穆祖는 免焉하니 後人이 名其巖曰虎隕石이라하다 穆祖 性豪放하여 有四方之志러니 在全州時에

    유 목조    면언      후안    명기암왈호운석           목조 성호방       유사방지지       재전주시

    有山城別監이 到州하여 納穆祖所幸妓(妓名桃紅)하니 因以構釁이 州한데 知州知州怒하여 穆祖

    유산성별감   도주       납목조소행기(기명도홍)     인이구흔라   주      지주지주노      목조

    語侵知 欲聞于朝하여 發兵圖之라 穆祖 知而徙居 江原道三陟縣하시니 民之願從而徙者 百七十餘家러라

    어침지 욕문우조      발병도지    목조 지이사거 강원도삼척현         만지원종이사자 백칠십여가

    後에 新除安廉史는 卽構釁之山城別監也라 穆祖 聞其將至하고 絜家浮海하여 至于咸吉道

    후    신제안염사는 즉구흔지산성별감야   목조 문기장지       혈가부해       지우함길도

    宜州勇珠里(今德源府) 居焉하시니 百七十餘家又皆從 之하다 旣而오 歸于元하여 移居斡東之地

    의주용주리(금덕원부) 거언         백칠십여가우개종 지      기이    귀우원     이거알동지지

    (재금경흥부동삼十里)하시니 元以 爲 穆祖 五千戶所 達魯花赤(元判官名)하니 東北之人이

    (재금경흥부동삼십리)         원이 위 목조 오천호소 달로화적(원판관명)       동북지인

    咸歸心이라 王業之興이 自此始하니라 (現 龍飛御天歌) 穆祖 勇氣自負하여 善騎射하고 好田獵하니

    함귀심      왕업지흥    자차시         (현 용비어천가) 목조 용기자부       선기사     호전렵

    戎人이 皆畏之러라 穆祖 在斡洞할세 每至女眞諸千戶所면 彼必宰牛馬하여 饗宴屢日하고 諸千戶

    융인   개외지       목조  재알동     매지여진제천호소     피필재우마     향연누일      제천호

    至斡洞에 穆祖 亦如之하여 隧數相宴會하다 慶興府南十餘里許赤池中 有圓峰하니 高三十五步요

    지알동   목조 역여지      수삭상연회       경흥부남십여리허적지중  유원봉     고삼십오보

    圍九十步로 四面이 沮如하여 人이 未易通行이라 德陵이 在峰上한데 於其葬에 中國人이 來相之하다

    위구십보   사면    저여      인    미이통행      덕릉    재봉상       어기장    중국인   래상지

    太祖 爲諸禪使時에 使吉州安撫使李原景으로 往視之할세 其鎭撫白忠信이 素知地理라 李原京

    태조 위제선사시    사길주안무사이원경      왕시지       기진무백충신   소지지리

    曰 此陵에 必有 子孫興 王子라한데 原景이 止之曰 汝勿復言 하라 하다 穆祖 丁憂未葬에

    왈 차릉    필유 자손흥 왕자        원경    지지왈 여물부언              목조 정우미장

    邊求吉地러니 一日에 有一白髮老翁이 植杖自言曰 大哉라 此地에 必有興王子矣로다 穆祖

    변구길지      일일    유일백발노옹   식장자언왈  대재   차지    필유흥왕자의     목조

    聞而進揖曰 渠雖不敏이나 願得其地焉하노라 翁이 愕然失色이라 穆祖 請之益懇한데 翁이

    문이진읍왈 거수불민     원득기지언          옹    악연실색      목조   청지익간     옹

    曰否否라 此地는 大穴而殺百牛以祭神이라야 方可得取니라 穆祖則諾한데 翁이 復難色曰

    왈부부    차지    대혈이살백우이제신         방가득취      목조즉락       옹   부난색왈

    葬非金棺卽 尤爲不可也어늘 而君其能然乎야 穆祖 又諾之왈 渠雖貧賤이나 如吾五世孫興王卽

    장비금관즉 우위불가야어늘 이군기능연호    목조 우락지왈 거수빈천      여오오세손흥왕즉

    百死無限而欲聞其葬 埋之術則 翁이 因忽不見이라 穆祖歸家太息而已러니 夫人이 問由則願歸聘家

    백사무한이욕문기장 매지술즉 옹   인홀불견        목조귀가태식이이     부인    문유즉원귀빙가하여

    能借百牛來呼아 何爲오 穆祖曰 有百牛然後에 可以爲葬이어늘 如吾無日牛에 何오

    능차백우래호    하위   목조왈  유백우연후    가이위장        여오무일우    하

    欲以白牛로 代百牛矣로다 夫人이 無已而借得 白牛以歸러니 穆祖 卽殺白牛하여 以祭山神하고

    욕이백우    대백우의     부인이  무이이차득  백우이귀     목조 즉살백우       이제산신

    且用麥莖하여 代金棺以葬허니 葬地는 卽 三陟 蘆洞 將軍公之墓云이라

    차용맥경      대금관이장      장지    즉  삼척 노동 장군공지묘운

     

    --- 해 역 ---

     

    목조께서 어린시절에 여러 아이들과 야산에서 놀고 있을 때 갑자기 소낙비가 내려 바위굴속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범 한 마리가 바위 앞에서 으르렁 거리거늘 모든 아이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찌 모두다 액이 있으리오.

    반드시 호랑이가 노리는 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 하고 각기 웃옷을 던져 시험해 보니 호랑이 목조의 옷을 움켜 물거늘 모든 아이들이 목조를 밀어 내니 호랑이는 점점 뒤로 물러가고 목조께서 한발 한발 다가서니 바위와의 거리가 약간 떨어질 찰라 바위가 무너지니 모든 아이들은 다 치여 죽고 목조께서는 그 화액을 면하시니 후세 사람들이 바위 이름을 지어 호운석 이라 하였다.

     

    목조께서 성품이 호탕하시여 사방으로 원유 하려는 뜻이 있었다. 전주에 계실 적에 산성별감이란 자가 있어 목조께서 사랑하시던 기생 도홍을 차지하려 하니 이로 인해 틈이 난지라 목조께서 비위를 거슬린 지주가 조정에 아뢰어 군병을 풀어 해코자 하니 목조께서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강원도 삼척골에 이사해 사시니 백성들이 이사해 살기를 원하는 자 170여 가구가 되었다.

     

    후에 또 새로 도임한 안렴사는 전에 전주에서 산성별감이라는 말을 듣고 목조께서 부득이 가족을 이끌고 배를 타고 함길도 의주 용주리에 이르러 살으시니 170여 호가 모두 따라 왔었다

    얼마 안 되여 알동땅에 이사해 살으시니 원나라에서 목조로 5.000호를 삼으니 동북면 사람들이 모두다 마음으로 열복하니 왕업의 조짐이 이때부터 시작 하였도다.

     

    목조께서 용기를 자부하여 말 타고 활쏘기를 잘하고 사냥하기를 즐기시니 여진족 들이 모두 두려워 하드라. 목조께서 알동에 계실 때 매양 여진 제천호의 곳에 가시면 저들이 반드시 소와 말을 잡아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고 제천호가 알동에 이르면 목조께서도 역시 같이 대접하여 자주 서로 만나 연회를 열어 대접하였다.

     

    경흥부 남쪽으로 십여리쯤 적지 가운데에 한 둥근 봉우리가 있으니 높이 35보이며 주위는 90보로 사면이 진들 밭으로 사람들이 통행하기 어려운지라 목조의 덕릉이 그 봉우리 위에 있는데 일찍이 장사지낼 적에 중국인이 와서 잡아 주었다.

     

    태조께서 제 선우 사신이 되었을 적에 길주 안무사 이경원으로 하여금 목조 묘소를 보려갈세 그 부하 백충신이 본래 지리학에 능숙한지라 원경에게 이르기를 이 산소에서 반드시 왕업을 이르킬 자손을 낳으리라 한데 원경이 손을 흔들며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한다.

     

    목조께서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명당자리를 구하기 위해 두루 돌아다니시는데 하루는 한 백발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 자리는 반드시 왕이 낳으리로다. 목조께서 그 말을 듣고 정중히 인사하고 제가 비록 불민하오나 그 자리를 얻고자 하나이다.

     

    노인이 깜짝 놀란지라 목조께서 다시 간청하니 노인이 머리를 저으며 말하기를 이 자리는 대혈이니 소 백마리를 잡아 산신께 제사 드려야 얻을 수 있으리라.

    목조께서 곧 응낙하자 노인이 또 다시 난색하며 이르기를 그것뿐만 아니라 금으로 만든 관을 쓰지 않으면 발복하기 어렵거늘 그대가 능히 그리할 수 있겠는가?

     

    목조께서 또 다시 대답하기를 제가 비록 빈천하지만 우리 오세손이 왕이 된다면 백번 죽어도 여한이 없소이다. 하고 장사 지내는 절차를 물으려 한즉 그 노인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다.

    목조께서 집에 돌아와 한숨짓고 고민하고 있더니 부인이 그 연유를 물음에 대답하기를 그대는 처가에 가서 흰 암소를 빌려 올 수 있겠는가 부인이 흰 암소를 어디다 쓰려 하나요.

     

    목조 대답하기를 소 백마리가 있어야 아버님 장례를 치를 것인데 내 소 한 마리도 없으니 어찌하리 내 白牛를 百牛로 대신하려 함이로다.

    부인이 부득이 친정에 가서 흰소를 빌려오니 목조께서 즉시 白牛를 잡아 산신께 제사 드렸다. 또 관을 보릿대로 싸서 금관을 대신하여 장사 지내니 이 자리는 즉 강원도 삼척 노동에 있는 장군공 휘 양무의 묘소라 한다.

     

     

    세덕사(世德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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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

     

    세덕사(世德祠)는 우리 중시조(中始祖) 완창대군(完昌大君)의 분묘(墳墓)와 부조묘(不祧廟)가 함흥 귀주동에 있으나 남북의 분단으로 남한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참배(參拜)나 봉사(奉祀)할 제각(祭閣)이 없어 종의(宗議)를 수렴하여 순양군파에서 1967년에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밀암동 종괘산(鐘掛山) 밑에 사당(祠堂)을 건립하고, 완창대군(完昌大君), 영성대군(永城大君), 밀양군(密陽君), 파성군(坡城君) 4위의 향사(享祀)를 모시다.

    1973년 정창군의 생부 파원군(坡原君)의 추배(追配)로 5位의 선조를 모신 신실(神室)이 세덕사(世德祠)이며 보반문(報反門)은 세덕사로 들어가는 문(門)을 말한다.

     

    2. 세덕사 연혁(世德祠 沿革)

     

    - 1963. 1.21. 동면 운농리 소재 체화정 매입(세덕사 건립용)

    - 1967. 완창대군 사우 세덕사 건립 세덕사 건립 후 순양군파 종중에서 향사와 업무관리

    - 1967. 3.17. 세덕사 선조 신위 봉안례 거행

    중시조 완창대군 휘 자흥. 영성대군 휘 천계.

    밀양군 휘 난.파성군 휘 사철. 4위 향사

    향사일 음력 3월 16일

    - 1969. 3. 세덕사 단청 공사

    - 1970. 3.16. 세덕계 발족

    - 1970. 3.16. ~ 1993.3.31.까지 23년간 지속

    - 1972. 3. 세덕사 중수 급 곡장 직사 개수작업

    - 1973. 파원군 휘 양덕 선조 추배로 5위 향사

    - 1976. 4. 향사일 변경 양력 4월 12일

    - 1988.11. 5. 세덕사 중건 상량식 및 봉안례

    - 1989. 4. 1. 세덕사 보존위원회 발족(순양군 종회에서 분리)

    세덕사 향사 및 업무. 종토관리. 고직사 신축

    - 1989. 3.31. 초대 보존회장- 진백. 총무 – 호선

    - 1990. 3. 향사일 변경 양력 3월 31일

    - 1993. 3.31. 2대 보존회장 – 진백. 총무 – 호선

    - 1996. 세덕사 단청 보수 작업

    - 1997. 3.31. 3대 보존회장 – 진백. 총무 - 호선

    - 2001. 3.31. 4대 보존회장 – 진백. 총무 - 호선

    - 2004. 3.31. 5대 보존회장 – 동호. 총무 - 호선

    - 2004. 8.20. 세덕사 소식지 세덕종보 및 세덕사지 발간 결의

    - 2004. 8.31. 세덕사 운영위원회 발족

    - 2005. 3.31. 세덕사지 및 세덕종보 발간 배부, 세덕종보는 매년 발행

    - 2006. 2. 3. 세덕사 양이재 건물 및 토지 양성화

    - 2006. 5.10. 세덕사 고직사 철거(순양회관건립 관계)

    - 2008. 3.31. 6대 보존회장 – 동호. 총무 – 성태

    - 2012. 3.31. 7대 보존회장 – 동호. 총무 – 성태

    - 2013.11.27 화순읍 감도리 788번지(답) 매매

    - 2010. 3.31. 세덕종보를 정간종보로 명칭 변경

    - 2015. 1.16. 앵남리 193번지(답) 매매

    - 2015. 4.23. 광주시 월곡동681-1번지 주공 아파트 상가2동 구입

    - 2016. 3.31. 8대 보존회장 – 병열. 총무 - 성태

    - 2016. 3.26. 세덕사 양이재 향사용 제복 6벌 신규 구입, 삼헌관용 3벌,

    집례용 3벌(양이재 분담 및 공유)

    - 2016. 3.31. 정간종보 발행 및 배부 파종회로 이관

    - 2017.11. 향사일 변경결의(매년 양력 4월 마지막 주 토요일)

    - 2018. 4.28. 향사일 변경 후 첫 향사 봉행

    - 2019. 4.28. 세덕사보존회 순양군파 통합결의

    - 2020. 1. 1. 세덕사보존회 순양군파 종회업무 재정통합 관리

     

    3. 정의 및 유래

     

    1) 세덕사 신실

    세덕(世德)이란 대대로 쌓아 내려오는 아름다운 덕(德)이란 뜻에서 유래되어 내려온 말이다. 세덕사는 순양군파(順陽君派)에서 파시조 할아버지의 향사를 모시고자 1963.1.21. 화순군 동면 운농리 소재, 체화정(棣華亭)을 매수하여 현재 위치인 화순읍 앵남리 밀암동으로 1967년도에 이축(移築)하여 사당 명(祠堂名)을 세덕사(世德祠)라 명명(命名)하였다.

    그 후 5년 후인 1972년에 각처 종현님들의 희사금으로 세덕사 중수(重修)와 양이재 중수를 하였다. 또한 1986년 병인보(丙寅譜) 편찬시 얻은 이익금과 종현들의 적극적인 동참으로 1988년 증(增) 개축(改築)하여 현재까지 보존 유지하고 있다. 세덕사 증.보수 후 「世德祠」 현판 글씨는 금오(錦塢) 고광열(高光烈)씨가 썼다.

     

    2) 보반문(報反門)

    보반문은 세덕사로 들어가는 출입문(出入門)으로 중앙에 두 짝의 여닫지 문이있고 여닫지 문 좌,우 양쪽에 출입문이 있다. 그 중 우측 문은 모든 제관(祭官) 또는 참사자(參祀者)들이 세덕사 신실로 들어가는 문(門)이고 좌측 문은 나오는 문(門)이며 가운데 문은 신(神)이 출입하는 문(門)으로 사람들은 통행하지 않는다.

    보반문(報反門)의 報反이란 원래 보본반시(報本反始)에서 유래 된 말로써 “생겨 나오게 된 근본을 잊지 않고 갚는다.”는 뜻이다. 가례증보(家禮增補) 1권 통례(通禮) 1에 의하면 보본반시(報本反始)의 보(報)는 “수지이례(酬之以禮 : 예로써 보답하는 것” 반(反)은 “추지이심(追之以心 : 마음으로 추모하는 것” 즉 존조경종지의(尊祖敬宗之意 : 조상을 존경하고 일가를 공경하는 것) 에서 유래 된다 라 했다. 「報反門」의 현판 글씨는 송정(松亭) 이상규(李像圭)씨가 썼다.

     

    --- 순양군(順陽君) 묘역 및 兩履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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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양군(順陽君) 휘 석공(石公)은 파시조 완창대군의 현손(玄孫)으로 밀은군 4남 경릉군(慶陵君)의 장자(長子)로 1438년 출생하셨고 후일 파성군(坡城君) 휘 사철(思哲)의 계자(系子)로 출계하였다.

    文科로 楊州牧使를 거쳐 湖南兵馬節度使를 끝으로 은퇴하시여 화순읍 삼천리에 退逸堂을 지어 노후를 보내시다 1493년 별세후 충남 아산 백암리 사전동 선영하에 계시다 1600년경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종괘산 밀암동에 곤좌(坤坐)로 이장(移葬) 하여 모셨다.

     

     

    --- 양이재(兩履齋) 순양군 제실(祭室) ---

    양이재는 순양군 휘 석공(石公)의 제사(祭祀)를 모시는 곳으로 1917년(丁巳)에 착공하여 1918년(戊午)에 완공하였으며. 이곳 제각에서 모시는 선조님은 순양군 長子 판관공 휘 자영(判官公 諱 子英). 次子 사인공 휘 세영(舍人公 諱 世英) 季子 주부공 휘 순영(主簿公 諱 順英). 삼형제와 장 손자(長 孫子). 집의공 휘 희춘(執義公 諱 希春). 차 증손(次 曾孫) 참의공 휘 소종(參議公 諱 紹宗). 차 현 (次 玄孫) 교관공 휘 정근(敎官公 諱 廷根) 선조등 7위를 향사하고 있다

     

     

    --- 양이재(兩履齋) 순양군 제실(祭室) ---

    두양(兩) 밟을이(履)

    兩履란 예기제의(禮記祭義)편에 의하면 상로기강(霜露旣降 )이어든 군자이지(君子履之)하고 필유처창지심(必有悽愴之心)하나니 비기한지위야(非其寒之謂也)라 하였으니 春에 우로기유(雨露旣濡)어든 군자이지(君子履之)하고 필유출척지심(必有怵惕之心)하야 여장견지(如將見之)이다 했다.

    즉 祭祀의 禮에 말하기를 가을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를 밟고 반드시 슬퍼하는 마음이 나나니. 이는 차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봄에 비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를 밟고 반드시 깜짝 놀라는 마음이 나와 장차 뵈일 듯 하느리라 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가을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부모가 또 가시는 것 같고, 봄에 비와 이슬이 내려 새싹이 나오면 부모가 다시 오실려는가 보다 해서 두 번 밟는다는 뜻에서 유래 된 말이다.

     

    --- 慶和門(경화문) 양이재 출입문 ---

    慶和門은 兩履齋 出入門이며 慶和門 이란 慶事 스럽고 和合 한다는 뜻이다.

     

     

    --- 순양군파 문중운영(門中運營) ---

    순양군파 문중은 1899부터 2010년까지 111년간 도유사. 사문중 유사 제도로 운영해 오다 2010년 도유사(都有司) 체제를 회장(會長) 체제로 바꾸어 부영구룹 이중근 종현을 초대(初代) 회장으로 선임하여 지금까지 운영해 오고 있다.

     

     

    --- 順陽君派 第3基 運營委員 및 監査---

    (2018. 8. 14.~~2022. 8. 14.)

     

    회장 : 중근. 수석부회장 : 병열. 부회장 : 양선. 부회장 : 호근

    감사 : 신근. 감사 : 종근. 총무 : 성태

    운영위원 : 형주, 병수, 형준, 영복, 진희, 봉근, 수근, 홍근, 한, 장근

    병한, 동기, 진태, 주현, 동호, 대균, 병문, 영근, 민기

     

     

    --- 일문육충(一門六忠) 과 마애비(磨崖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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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화순군 동면 신운리(장자마을) 도로옆 암벽에 전주이씨육충지려(全州李氏六忠之閭)라 새겨진 마애비(磨崖碑)가 있다. 한 가문(家門)에서 한분의 충신(忠臣) 이 계서도 가문의 영광(榮光) 인데 순양군파 문중에는 여섯분의 충신이 계시니 어찌 가문의 자랑이 아니겠는가.

     

    1593년(壬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순양군의 증손(曾孫) 휘 사종(嗣宗)과 동생인 소종(紹宗) 형제와. 사종의 장자(長子) 휘 정립(廷立) 세분은 倡義하여 의병(義兵)을 이끌고 忠州와 楊州 전투에서 큰 공(功)세웠으며. 회령부(會寧府) 아전인 국경인(鞠敬引)의 반란으로 모병(募兵)차 회령에 와있든 선조(宣祖)의 두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고 순화군(順和君)을 붙잡아 왜군(倭軍)에게 넘겼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국경인을 목베이고 두분 왕자님을 구출하신후. 임금이 계신 義州 행재소로 달려서 환궁(還宮)하는 宣祖大王의 어가(御駕)를 한양까지 호위(護衛)하였으며 그 공로로 왜란이 끝난뒤 세분 모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셨으며.

     

    1636년(丙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순양군 현손(玄孫) 즉 嗣宗의 2남 휘 정추(諱 廷樞) 3남 휘 정기(諱 廷機) 4남 휘 정근(諱 廷根) 삼형제가 倡義하여 의병(義兵)을 모아 강화도로 가던중 양천구에서 청나라 병사와 전투하여 수십인을 베고 다시 남한산성에 포위되여 있는 仁祖大王을 구출하고자 가던중 과천 남태령에서 청군에게 포위되여 혈전하였으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삼형제 모두 장열하게 전사하니 세분의 용맹에 적들도 감복하여 시신을 거둬 초빈(草殯)하고 기를 세워 경의를 표하니 이때 12월 27일로 세분의 기일(忌日)이 같은 날이다.

     

    세월이 흘러 여섯분의 충절은 英祖大王 재위 때 유생 임장수를 비롯한 호남지방 유생들의 상소(上疏)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임금님께서 공을 치하 하시며 여섯분 선조님들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하고 벼슬을 증직(贈職)하니

    휘 사종(諱 嗣宗)통정대부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左承旨兼經筵參贊官)

    휘 소종(諱 紹宗) 통정대부 호조참의(通政大夫戶曹參議)

    휘 정립(諱 廷立) 동몽교관(童蒙敎官))휘 정추(諱 廷樞) 동몽교관(童蒙敎官)

    휘 정기(諱 廷機)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휘 정근(諱 廷根)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 하고

        정문(旌門) 세워 정포(旌褒)하라는 특명(特命)이 차례로 내려 왔으나

    당시 후손들이 六忠碑와 정문(旌門) 세우기에는 일이 너무 크고 힘이 미약(事巨力綿)하여 차선책으로 도로변 암벽에 마애비로 대신하였다최근에 후손들이 선조님들의 충절(忠節) 날리 알리고자 마애비 옆에 육충비를 세우고 주변을 성역화(聖域化) 하고자 주변 토지 매입을 시도하였으나 문중 재력으로는 매입이 불가하여 앵남 선산 초입에 一門六忠碑를 세우고 매년 6월6일 현충일에 순양군파 후손들이 모여 추도식(追悼式) 거행하고 있다.

     

     

    --- 육충 선조님들이 남기신 詩(시)---

    諱 사종(嗣宗)

    여국동휴척(與國同休戚) 기쁨과 근심걱정 나라와 함께하고

     사생서일심(死生誓一心) 죽고 사는것 한 마음으로 맹세하네

    도도여지수(滔滔汝之水) 도도히 흐르는 여미의 물은   

    일석조해심(日夕潮海潯) 낮과 밤으로 바다에 흘러가는구나

     

     

    --- 諱 정립(廷立)---

    추풍경화몽(秋風驚畵夢) 가을바람에 낮 꿈꾸다 놀라니   

     백일조단심(白日照丹心) 밝은 해가 붉은 마음을 비추니   

     격검서등냉(擊劍書燈冷) 검도를 익히고 글 읽는 등불이 차니 

    보군일념심(報君一念深) 임금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만 깊구나.

     

     

    --- 諱 정기(廷機)---

     회수동천천일출(回首東天天日出) 동쪽하늘에 머리를 돌림에 해가 돋으니 

    요마여적지망간(么麽如賊指鋩間) 보잘것없는 오랑캐를 칼끝으로 가리키네

     긍천강상종난상(亘天綱常終難喪) 하늘에 뻗치는 강상은 없어지기 어려우니

    거작장홍할북관(去作長虹割北關) 긴 무지개를 만들어 북관을 베이리라  

     

     

    --- 諱 정근(廷根)---

    의검추풍루망경(依劍秋風淚望京) 가을바람에 칼 집고 서울을 보며 눈물지우니

    한천의기독쟁영(寒天義氣獨崢嶸) 추운 날에 의기만 높고 우뚝 하구나    

     추연열조신명재(楸然列廟神明在) 추연히 역대 임금의 신명이 계시면     

    충분당당창응병(忠憤堂堂倡應兵) 충성과 의분으로 당당히 의병에 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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