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世 파성군(坡城君) 휘 사철(思哲) 행장(行狀) |
제4세 파성군 휘 사철(思哲)은 밀양군의 제3남으로서 시조 司空公으로 부터24세이고 派祖 완창대군으로 부터 4世이다. 공의 諱는 사철(思哲) 字는 성지(誠之)이며,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다.
1411년(태종 11 신묘)에 태어나 세종 14 壬子年에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 박사(博士)에 보직되었고, 누천(累遷)하여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서 다시 도승지(都承旨), 이조(吏曹) 예조판서(禮曹判書), 의정부좌찬성(議正府左贊成)에 올랐다.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사은정사(謝恩正使)수양대군(首陽大君)의 부사(副使)로써 명나라에 다녀왔고 익년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등의 숙청에 참여하여 정란공신(靖難功臣) 일등에 올랐다. 이여 벼슬이 좌의정에 오르고 또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올라 견성부원군(甄城府院君)에 봉(封)해졌다.
공은 천성이 순진하고 평소에 말이 적었으며 술(酒)을 좋아했으나 주정을 부리지 않았다. 少時적부터 독서를 하며 동년배(同年輩)들과 놀 때 조금도 양보가 없었다.
세종 때 파계종적(派系宗籍)으로 초수(超授)되여 드디어 달관(達官)에 까지 이르렀다 한다. 공은 종실의 혹화를 여러 번 보고 양주(陽州) 발산(鉢山)으로 은퇴하여, 1456년(세조2년 병자)에 향년 52세로 세상을 떠나니 뒤에 문안(文安)이라는 소호를 내렸다.
일설에 의하면 계유정난(癸酉靖難)때 남령위 궁의 단종(端宗) 행재소에서 임시정부를 세운 수양대군(首陽大君) 이 명패(名牌)로 많은 대신들을 불러 들여 살육을 했을 때 정인지(鄭麟趾)를 비롯한 이계순(李季旬) 같은 무리가 수양대군에게 충성의 아첨을 하느라 “나으리 이미 밤이 깊었으나 국가대사인 즉 지금 곳 황보인(黃甫仁)의 수급(首級)을 가지시고 상감께을 주달함이 옳을 듯 하외다” 하고 발의해서 황보인의 머리를 자르게 되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소위 적괴를 참하는 절차와 형식을 갖추려 하였으나 파성군은 “그것은 그래서 무엇하나 모든 것이 비공식인데 이왕 죽는 것이니, 아무렇게나 목을 자르면 그만 아니냐”하고 반대해서 모든 사람의 주목을 끌었다.
그때야말로 수양대군의 일거일동에 뭇 대신들의 눈이 쏠리고 수양대군의 기분 하나로 목이 달아나는 판인데 坡城君이 그 어마어마한 자리에서 수양대군의 비위를 거슬리는 그런 말을 하니 좌우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의 묘는 갑자보(甲子譜)에는 陽州 가마동(加馬洞) 子坐라 기재되어 있고 경자보(庚子譜)에는 完山 서록(西麓) 子坐로 기재되어 있으나 문안공이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 후에 은퇴하여 양주 발산(鉢山) 이르렀다는 說을 근거로 양주 가마동에 墓가 있었든 것이 온당(穩當) 한 것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문안공의 묘가 실전(失傳)되어 매년 4월 마지막 토요일에 화순 세덕사에서 공의 제향(祭享)을 모신다. 配位는 부부인(府夫人) 화순 崔氏로 父 는 찬성(贊成) 예(睿)이며, 묘는 합폄(合窆) 되었으나 실전되어 세덕사에서 문안공과 함께 향사(享祀)한다.
○ 계유정난(癸酉靖難) : 세종을 이은 문종이 일찍 죽어 단종(端宗) 이 즉위(卽位)하자 수양대군은(首陽大君)은 단종 및 그를 보좌(補佐)하든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등을 살해하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축출(逐出) 한 후 왕위(王位)를 찬탈하니 이것이 계유정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