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世 밀은군(密恩君) 휘 섭(攝) 행장(行狀)

     

    제 3世 밀은군 휘 섭(攝)은 영성대군 제 2남으로 始祖 司空公의 23세이고 派祖 완창대군의 3世로 둘째 孫子이시며, 우리 순양군 할아버님의 생 조부이시다

    공의 諱는 섭(攝)이고 호(號)는 신혜당(愼慧堂)이다.

     

    영성대군 천계의 차남이고 어머니는 부부인 밀양박씨로 판부사 종건(宗健)의 딸이다. 문과로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천성이 강직하여 간쟁지절(諫諍之節)이 있었다. 1457년(세조 3)에 육종영(六宗英)의 충성을 누차 상소하여 직간하다가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1872년(고종 9)에 밀은군 영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소는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임좌이고 충남 아산 선영에서 매년 양력 11월 첫째주 일요일 향사하고 있다.배위는 현부인 장흥위씨(長興魏氏)로 2남을 두었다. 묘소는 함흥 후주동 사봉하 간좌이다.

    배위 현부인 경주김씨는 1373년(고려 공민왕 22)에 태어나 1434년(세종 16)에 별세했다. 3남을 두었다. 묘소는 밀은군과 합폄이다

     

    공은 1359년(고려 공민왕 8년 기유)에 출생하셨고 文科에 급제 후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공은 평소에 성품이 강직(剛直)하여 바른 말을 서슴치 않으셨으니 1457년(세조 2년 정축)에 세조에게 누차(累次) 상소(上疎)하여 육종영지충(六宗英之忠)을 직간(直諫) 하다가 세조와 공신들의 미움을 받아 신안군 지도(智島)로 유배(流配) 당하였으니, 公의 사적(事蹟)은 선원보(璿源譜)와 사화록(士禍錄)에 기록되어 있다.

     

    공의 墓는 충남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 사전동(巳田洞)에 임좌(壬坐)로 계시며, 配位는 현부인 장흥위씨(縣夫人長興魏氏)이며, 슬하에 2남을 두시니 경천군(慶川君), 경신군(慶信君)이며, 배위의 墓는 함흥(咸興) 후주동(厚住洞)에 간좌(艮坐)로 계시며 비갈(碑碣)이 있다.

    繼 配位는 현부인(縣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로 1373년 고려(공민왕 22년 계축) 출생하여 1434년(세종16년 갑인)년에 돌아가시니 墓는 밀은군과 합폄(合窆)했다. 슬하에 3남을 두시니 경의군(慶義君), 경릉군(慶陵君), 경양군(慶陽君)이다.

     

    ○ 밀은군 묘소가 甲子譜에는 아산 사전동 壬坐라 하고, 庚子譜에는 함흥 후주동 寺峯下 艮坐라 하여 두 가지 說이 있어 고민이 많았으나 옛 어른들 얘기가 외적이 우리 사전동 묘역을 충무공 이순신의 덕수이씨 선산으로 오인하여 묘에 석물을 훼손하였다 한다. 그러고 보니 사전동 선영 내에 부석(趺石)만 남아있는 분묘가 많으며 석물 잔해가 사방에 산재 되어 있으니, 옛 어른들의 말씀이 신빙성이 있다 하겠다.

    밀은군 묘소에도 지유부석(只有趺石 : 돌기둥만 남아있는 것)하고 봉분이 산처럼 조성 되었고 묘 좌, 우에 걸연(傑然)한 장군석(將軍石)이 있으니 封君한 밀은군의 묘라 짐작 하겠다

    만일 밀은군의 묘가 아니고 밀은군 둘째부인 경주김씨의 묘라면 조산 같은 봉분과 걸연한 장군석이 있을 수 가 있겠는가? 愚見으로 생각해도 밀은군 첫째부인 장흥 위씨는 두 아들과 함흥에서 거주했으니 죽은 후 후주동에 葬事하고 두 아들 경천군, 경신군 墓도 함흥에 있으며, 밀은군이 지도에서 유배 후 아산에서 둘째 부인 경주김씨와 같이 생활을 했으니 돌아가심에 합폄(合窆)하였고 아들 경의군, 경릉군 墓는 아산 선영내에 경양군 묘는 전북 진안에 있다는 것이 온당하다 생각한다.

    1987년(丁卯) 3월 15일에 밀은군 후손들이 모여 난상토론 끝에 甲子譜 기록이 맞다고 확정해 후일에 후손들의 의혹을 풀기로 宗意(종의)를 모았다.

     

    회의 참석자 서원군파 : 오봉, 병규, 태현, 호엽, 호승, 용철, 서성

    순양군파 : 승동, 백현

    상산군파 : 전웅

    진남군파 : 영열, 성구

    진풍군파 : 중행, 중현, 태호

     

    --- 밀은군 휘 섭 비갈 ---

     

     

    公의 姓은 李요 諱는 攝이고 號는 愼慧堂 이시다. 本貫은 全州로서 永城大君 天桂公의 次男 이시며 太祖 高皇帝의 조카이시고, 祖父는 完昌大君 子興公 이시며 生 祖父는 桓祖大王(子春公)이시다. 公은 度祖大王의 曾孫이시며 翼祖大王의 玄孫이시며 穆祖大王의 5代孫이시고 始祖 新羅司空 翰公의 22代孫이시다. 公은 1359年(恭愍王7)에 出生 하셨는데 人品이 남달리 出衆하시고 일찍이 文科에 及第하셔서 崇錄大夫 行 工曹判書를 歷任 하셨다.

     

    公은 本來 正義感에 透徹하셔서 不義를 보시고는 참지 못하시는 性品이신지라 端宗廢位를 죽음으로 反對한 六宗英 安平大君 瑢, 錦城大君 瑜, 和義君 瓔, 漢南君 어, 永豊君 義安大君 孫 穰의 忠節에 대하여 여러번 直諫 上疏 하시다가 世祖의 노여움을 사서 1457年(世祖3)에 智島(現 全南 新安郡 智島面)로 流配 되셨다가 作故 하시니 享年 98歲였다. 1872年(高宗9)에 密恩君에 追封되어 嶺宗 正卿이 되셨으니 3世 宗正 이시다.

     

    公의 墓所는 忠南 牙山郡 塩峙面 白岩里 後麓 壬原에 계시다. 配位는 貞敬夫人 長興魏氏로서 墓는 咸興 歸州洞 寺峯山下 艮原에 계시며 繼 配位는 貞敬夫人 慶州金氏로서 墓는 忠南 牙山郡 公의 墓所에 雙穵 되셨다. 公은 5男을 두셨으니 慶川君.慶信君은 長興魏氏 所生이시고 慶義君, 慶陵君,慶陽君은 慶州金氏 所生 이시다.

     

    慶川君 重卿은 벼슬이 左軍司直을 지냈고 慶信君 重寶는 參判을 지냈고 慶義君 守仁은 文科에 及第하여 忠淸監司를 지냈고 世祖때 原從功臣에 策錄되어 修任校尉 副司直을 지냈고 慶陵君 守義는 佔畢齊 金宗直 先生에게 師事하고 文科에及第하여 義州牧使를 慶陽君 重芳은 左贊成을 歷任했다.

    그리고 歷史的으로 太祖 高皇帝께서 追尊한 4大王(穆祖, 翼祖, 度祖, 桓祖)孫 中 가장 두드러진 宗派는 度祖大王의 아들이신 完昌大君(子興)派로 公의 白氏 密陽君 蘭(判書)과 그 後孫인 坡川君 思明(功臣, 判書), 坡城君 思哲(左議政)等이 輩出 되었다.

     

    公의 德性과 正直이 밑거름이 되어 子孫이 繁盛 하였고 永遠토록 우뚝함은 公의 根深枝茂의 表象이로다. 公의 業蹟은 訓育과 報本의 본보기로서 그 遺風은 靑史에 길이 山高水長 하리라, 1987年 2月 29日 文學博士 李錫浩 지음, 招待作家 李旺載 쓰다.

     

     

    ○ 육종영지충(六宗英之忠) 일명 육종영(六宗英) 사건이란? 밀은군 선조님이 정의감이 투철하시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이시라, 세조대왕이 등극하는 과정에 단종을 비롯한 종친과 사육신 등 여러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

     

    육종영 사건이란 단종의 폐위를 죽음으로 반대 한 종친들 안평대군(휘.용), 금성대군(휘. 유), 화의군(휘. 영), 한남군(휘. 어), 영풍군(휘. 천), 의안대군 손자(휘. 양) 등의 충절에 대해 여러번 직간하고 상소하니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1457년(세조3년)에 지도(현 신안군 지도면)로 유배를 당하신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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