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선계(璿源先系) 및 선원 세계도 |
우리나라가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에 속해 살아 왔지만, 우리 나름대로 독특한 한자 용어가 있다.
임금님의 조상을 “선원(璿源)” 이라고 한다든지 임금님은 만백성의 어버이 이기 때문에 한 씨족의 시조가 될 수 없어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라고 하는 표현 등은 모두 우리의 독특한 용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옥(璿)은 돌중에서 가장 값져 임금님에 비유되므로 임금님의 조상들을 “구슬의 근원 또는 구슬 같은 뿌리” 라는 뜻에서 이런 용어를 쓴 듯하다. 또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는 군왕불감기조(君王不敢其祖)라고도 하여 제왕 또는 임금은 감히 그 임금을 시조로 하는 종파의 조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임금님은 모든 백성의 공동의 부모 곧 국부(國父)이므로 한 파(派)의 시조(始祖)또는 중시조(中始祖)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님을 1세로 하여 세대(世代) 따지는 것은 불경(不敬)스럽게 여겨 왔다.
그래서 우리는 시조로부터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아버지인 양무장군(陽茂將軍)까지를 선원선계(璿源璿系)라 하고, 목조대왕으로부터 왕통계(王統系)인 순종 황제까지를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 하며 목조대왕의 왕자파(王子派) 이후부터 조선의 마지막 순종 황제의 왕자 군(王子 君)까지의 각 파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 (璿源續系)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시조로 부터 17세 양무장군까지의 직계와 방계의 3파 즉 시중공파(侍中公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는 모두 선원 선계에 속한다.
선원세계(璿源世系)는 추존왕 4대와 태조 고황제부터 순종 황제까지 20세를 합쳐 24세의 역대 왕의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는 목조대왕(穆祖大王), 익조대왕(翼祖大王) 도조대왕(度祖大王)까지 추존 3王을 선원선계라 할 수 있다.
분파(分派)는 목조대왕(穆祖大王)의 5왕자로 부터 장조(莊祖)의 3왕자군까지 도합 125의 派가 있었으나 무사(無嗣)의 군파가 있어 현재는 105여 파로 분리되고, 2019년 12월 현재 사단법인 전주리씨 대동종약원에 등록한 파종회는 86개 파다. 이 86개 파중 완창대군파는 도조대왕의 제1남인 완창대군 휘 자흥(子興)을 계별지조(系別之祖)로모신 파(派)이다.
〇. 선원 선계도(璿源 先系圖)
범례 : ( )는 세 를 의미함
선원 선계 선조님의 행장(行狀) (始祖 ~17世 陽茂) |
◈ 제1세 시조 사공공 휘 한(翰)
우리 전주 이씨의 始祖는 신라후기 문성왕(제위 839~857) 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휘 한(호: 견성) 이다.
사공이란 직책은 3공의 하나로 土地와 民事를 맡은 고대 정승직을 말하며 조선조 때는 공조판서(工曹判書) 의 직급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시조 휘 翰께서는 총명이 뛰어나시고 재질이 특이하시어 문일지십(問一知十) 즉 하나를가르치면 열을 아시며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시어 그 인품이 크게 떨쳐 신라 문성왕이 사공 벼슬을 주었는데 치민(治民) 한지 1년 남짓해서 국정이 공평해지고 백관(百官)이 화합하여 온 백성들이 좋아하며 생업을 즐겼다.
그래서 신라 태종 무열왕의 10세손 군윤 김은의(金殷義) 공이 자기의 금지옥엽 같은 딸과 혼인을 시켜 아들 자연(自延)을 낳으시니 이로서 자손이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지금에 우리 전주이씨가 400백만이라는 거족을 이루는 시작이 된 것이다.
시조의 묘는 전라북도 전주시 건지산에 있으나 국조선원보략(國朝璿源譜略)에의하면 시조의 산소가 실전되어 고종 광무 3년(1899) 4월 8일에 산소앞에 제단을 마련하여 단호(壇號)를 조경단(肇慶壇)이라 이름하고 5월 25일에는 산소에 흙을 더 쌓아올려 봉분을 크게 만들었다.
따라서 현재의 조경단 국내 어딘가에는 시조 할아버지의 체혼(體魂)이 계시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태조 고황제(太祖考皇帝 :이성계)께서 등극(登極) 하신 후 특명으로 전주 건지산에 수호군을 두고 초목(樵牧: 나무베고 짐승 사육)을 금하고 전주를 풍패지현(豊沛之縣)이며 어향(御鄕)이라 해서 완산 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 하였고 태종 3년(1403년)에다시 전주로 했다.
시조 사공 휘 한(翰)의 행장에 관한 기록은 선원선계, 완산실록, 조경단 비음기 등에 기술되어 있다.
○ 국조선원보략 : 왕실세보로 숙종 때 처음 나오고 1897년에 개정판을 간행하였다.
○ 풍패지현 : 선조가 탄생하신 발상지를 말함
○ 경 기 전 : 태조 고황제(이성계)의 어진(임금 초상화)을 봉안한 전각 이름
◈ 제 2세 시중공 휘 자연(侍中公 諱 自延)
제2세 휘 자연은 벼슬이 신라 경순왕(재위 927~935) 때 시중(侍中)이고 배위(配位)는 윤(尹)씨로 진양군(晉陽君) 자인(自仁)의 따님이다. 시중공이 1남을 두시니 휘(諱) 천상(天祥)이시다.
시중공의 행장은 선원선계. 완산실록에 기술되어 있다.
○ 시중(侍中) : 신라 때 집사성의 장관으로 국정을 총괄하는 대신의 직책
◈ 제 3세 복사공 휘 천상(僕射公 諱 天祥) 복야공이라고도 함
제 3세 휘 천상은 벼슬이 복사(僕射)에 이르렀고 배위(配位)는 영일 鄭씨로 시랑(侍朗) 벼슬을 한 습명(襲明)의 따님이다. 복사(야)공께서는 젊으셨을 때
성품이 호방하여 거리낌이 없다가 만년에는 철학연구에 취미를 가지시고 중국으로 건너가 삼성문하(三省門下)에서 천문지리학(天文地理學)을 공부하여 9년만에 천문지리를 통달하는 경지에 이르러서 만물의 운행과 이치를 능히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우리나라로 돌아와 전주 인지산(麟趾山 : 일명 향인산) 왕자봉 아래에 선산을 모시고 난 후 "내 후손이 왕이 될 자손이 반드시 날 것인즉중간에 어떤 곤고(困苦)가 닥칠지라도 절대로 천장(遷葬:묘를 다른 곳으로 이장)해서는 안 된다."라고 당부하셨다. 이것이 기록상 전주 이씨가 전주에 복지(卜地) 한 최초의 전거이다. 복사(야)공이 1남을 두시니 휘 광희(光禧) 이시다.
○ 복사(僕射) : 중국 당, 송나라 때 벼슬 이름인데 우리나라는 고려 때 있던 시중 다음가는 정2품 직인데 신라 때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시랑(侍朗) : 신라와 고려 때 썼던 직명으로 고려 때 정4품, 이조 때 정랑, 좌랑 등과 같다.
◈ 제 4세 휘(諱) 광희(光禧)
제 4세 휘 광희는 아천 벼슬을 지냈고 배위(配位)는 황(黃)씨로 대장군 지선(志善)의 따님이다.
아천공이 1남을 두시니 휘 입전(立全)이시다.
아천공의 행장에 관한 기록은 선원선계와 완산실록에 기술되어 있다.
○ 아천(阿千) : 阿尺千 또는 아찬이라고도 하며 신라 17관등의 6두품에 해당
◈ 제 5세 사도공 諱 입전(立全)
제 5세 휘 입전(立全)은 벼슬이 사도(司徒)에 이르고 배위는 白씨로 한림(翰林) 광선(光善)의 따님이다.
사도공이 1남을 두시니 휘 긍휴(兢休)이다. 사도공의 행장은 선원선계 및 완산실록에 기술되어 있다.
○ 사도(司徒) : 교육. 호구. 제화를 맡은 3공의 하나이다.
◈ 제 6세 고려 사공공(司空公) 휘 긍휴(兢休)
제 6세 휘 긍휴(兢休)는 고려조에 司空 벼슬에 이르고, 배위(配位)는 李씨로, 正言, 대광(大光)의 따님이다.
사공께서는 나이 26세 때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문과에 오르시고 30세에 예천태수(醴泉太守)가 된 후 7년 만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셨다가 몇 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관사재(觀史齋)에서 돌아가셨다.
이때 같이 중국으로 갔던 부인 李氏가 7세 된 어린 아들 염순(廉順)을 데리고 그 유골을 찾기 위하여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중국 조정에 호소하였다.
그런데 부인 이씨가 그 유골을 찾던 중 완탑촌(完㙮村)이란 마을에서 유숙하실 때 꿈에六金佛이 나타나 "공의 유골이 항주(沆州) 땅의 탁산(卓山) 아래 묻혔다"고 알려주어 비로소 유해를 찾았고 또 천자의 칙명으로 이를 거두어 우리나라로 돌아와 선영아래 장사를 모시게 되었다. 司空公이 1남을 두시니 휘 염순(廉順)이다.
사공공의 行狀에 관한 기록은 선원선계와 완산실록에 기술되어 있다.
◈ 제 7세 호장공(戶長公) 휘 염순(廉順)
제 7세 휘 염순(廉順)은 벼슬이 생원(生員)으로 호장(戶長)에 이르렀고, 배위(配位)는 鄭씨로 첨대정승익조(僉隊政承 翼祚)의 따님이다.
호장공이 1남을 두시니 휘 승삭(承朔)이다. 戶長公의 기록은 璿源先系 및 完山實錄에 기술되어 있다.
○ 호장(戶長) : 고려조 때는 각 지방자치의 長으로서 인수(印綬)를 가지고 전권을 행사함
◈ 제 8세 호장공(戶長公) 휘 승삭(承朔)
제 8세 휘 승삭(承朔)은 생원으로 호장(戶長) 벼슬에 이르렀고 배위(配位)는 白氏로 시랑(侍郞) 광현(光賢)의 따님이다. 호장공은 어려서부터 편모(偏母)에게 효성을 지극히 하여 사람들이 모두 동방의 효자라 칭찬하였다. 67세에 생원으로 등과 하셨고, 문학과 덕망이 조야에 떨치셨다.
호장공께서는 전주의 향린산(香麟山)에 올라 선산에 성묘 하신 후 산세(山勢)를 두루 살피고 돌아오시다가 청평산(靑平山) 아래에 이르러 돌연이 객관에서 돌아가셨다. 이에 왕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호상(護喪)케 하고 시호(諡號)를 문효(文孝)라 내리시고 서원(書院)에모셔 종사(從祀)케 하셨는데
고려 말년에 이르러 폐사(廢祀) 되었다. 호장공이 1남을 두시니 휘 충경(充慶)이다. 戶長公의 行狀에 관한 기록은 璿源先系와 完山實錄에 기술되어 있다.
◈ 제 9세 생원공(生員公) 휘 충경(充慶)
제 9세 휘 충경(充慶)은 생원(生員) 벼슬을 하셨고, 배위(配位)는 尹氏로 생원 자필(自必)의 따님이다.
생원공이 처음에 살림 형편이 말이 아니어서 이리 저리 떠돌아다닐 때 김지원(金志元)이란 풍수지사(風水地師)가 말하기를 "아마도 공의 선조 산소를 흉지(凶地)에 잘못 모신 까닭으로 이처럼 공의 가세(家勢)가 기울어 곤궁할 것이오." 라 했다.
이에 생원공은 풍수지사와 함께 향린산(香麟山)에 올라가 산맥을 두루 살펴본 후 풍수지사는 "이 산소를 여기에 모셔 둔다면 7.8代에 가서는 멸망하고야 말 땅이므로 속히 천장(遷葬)하는 것이 옳다고 보오." 했다.
이 권고에 생원공께서는 "그렇다면 다른 마땅한 땅이 어디 있소" 하고 물었다 풍수지사가 대답하기를 "청령산(靑嶺山) 아래에 5代에 걸쳐 정승(政丞)이 연달아 나올 명당인 그곳으로 천장함이 옳으오" 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부인 윤씨의 꿈에 흰옷 입은 노인이 나타나 "무슨 연유로 先代의 유골을 함부로 옮기려 드는 것인가?" 청령산 아래 5代에 걸쳐 政丞이 나올 자리는 금(琴)가 姓이 들어갈 땅인데 거문고 갑속에 오얏 "李" 가 들어가서 어찌 평안하리오. 이로서미루어 볼 때 천장하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오." 라고 하였다.
이에 윤씨는 꿈의 징조가 상서롭지 못함을 남편에게 말씀하고 만류 했으나 남편은 듣지 않고 김지원과 함께 향린산 아래에 이르렀는데 돌연 뇌성이 진동하여 벼락이 떨어져 김지원은 죽고 공은 바위 아래 은신했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오셨다. 생원공(生員公)이 1남을 두시니 諱 경영(景英)이다.
생원공의 행장에 관한 기록은 선원선계 와 완산실록에 기술되어 있다.
◈ 제 10세 호장공(戶長公) 諱 경영(景英)
제 10세 휘 경영(景英)은 벼슬이 생원(生員)으로 戶長에 이르렀고 배위(配位)는 尹氏로 유수(留守) 벼슬을 한 인필(仁必)의 따님이다.
호장공이 겨우 7세 때 부모가 다 별세하시니 증조모 鄭氏께서 노쇠한 몸으로 등에 업어 키우셨다. 16세 때 尹氏와 결혼했는데 아내 윤씨는 극노하신 증조할머니를 봉양하는데 증조할머니가 이가 모두 빠져 음식을 씹어 자실 수 없음으로 윤씨가 자기 젓으로 봉양해 드려 천수(天壽)를 마치셨다.
이에 향당 사람들이 입을 모아 세상에 드문 효손부(孝孫婦)라 칭송하였다. 호장공이 1남을 두시니 諱 충민(忠敏)이다. 호장공의행장에 관한 기록은 선원선계 및 완산실록에 기술되어 있다.
◈ 제 11세 장사공(長史公) 諱 충민(忠敏)
제 11세 諱 충민(忠敏)은 長史벼슬에 이르시고 配位는 대장군 최오헌(崔五憲)의 따님이다.
長史공은 처음에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의탁할 곳이 없었는데 하루는 별안간 푸른 옷을 입은 동자(靑衣童子)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 세상 미련한 인간들은 모두 천명을 모르고서 하늘을 원망하고 또는 저희들 인간끼리 멋대로 헐뜯고 싸움을 하는데 공께서는 다른 사람과 달리 하늘도 원망치 않고 사람도 허물하지 않으심은 오로지 天命을 기다림인가?" 라고 말하기에 공께서 대답하기를 "우리 인간의 부귀 빈궁과 영달은 모두 운명에 달려있거늘어찌 감히 이치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지껄일 것인가?" 했다.
이에 푸른 옷을 입은 동자는 매우 기뻐하면서 이상한 물건을 하나를 내어주며 당부하기를 "앞으로 거룩한 천명이 공의 자손에게로 돌아갈 때에는 이 물건이 반드시 활과 화살로 변할 것이요. 따라서 그 화살로 교룡(蛟龍)을 쏘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장사 공께서 받아 본 즉 흙으로 된 것은 아니면서 술잔 비슷하게 기묘한 데가 있어 그것을 숨겨두고 靑林山 아래서 그릇을 구어 파는데 구어 내는 그릇이 뒤틀리거나 우구러지지 않기 때문에 버릴그릇이 생기지 않음으로 가계(家計)가 점점 나아져서 연말에는 부자라는 말을 들었다.
長史公이 1남을 두시니 휘 화(華)이다. 장사공 행장에 관한 기록은 선원선계 외 완산실록에 기술되어 있다.
○ 장사(長史) : 고려 때 東宮(세자궁)에 딸린 벼슬로써 종7품에 속하고, 이조 때에는 세손위도사(世孫衛從司 왕세손의 경호사령부)에 있던 종 6품직으로 좌, 우 장사 2인이 있다.
◈ 제 12세 추밀공(樞密公) 諱 화(華)
제 12세 諱 화(華)는 벼슬이 추밀(樞密)에 이르시고, 배위(配位)는 대언(代言) 황진(黃璡)의 따님이다.
樞密公이 처음에 가세가 곤궁하여 가사는 돌보지 않고 술집과 창기의 집을 방황하면서 협객으로 자처 하셨다. 또한 부인 黃氏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어렵게 지내는데 강도가 겁간하려 할 때 이를 물리쳐 왕이 상을 내리고 붉은 문을 세워 세상에 널리 알렸다. 樞密公이 1남을 두시니 諱 진유(珍有)이다.
추밀공의 行狀에 관한 기록은 선원선계와 완산실록에 기술되어 있다.
○ 추밀(樞密): 밀직사(密直司) 또는 중추원(中樞院)이라고도 하는 추밀원의 원사, 또는 부사를 말하는데 추밀원사는 종 2품직이고 부사는 정3품의 높은 직위다.
○ 대언(代言) 승지(承旨)
◈ 제 13세 호장공(戶長公) 諱 진유(珍有)
제 13세 諱 진유(珍有)의 벼슬은 生員으로 호장(戶長) 이르렀고, 배위(配位) 는 첨대중찬사(僉隊中贊事) 벼슬을 한 오대박(吳大朴)의 따님이다.
生員公이 처음에는 집이 가난 했으나 어머니를 효도로 받들었고, 아내 오씨는 시집와서 가난을 탓하지 않고 나물을 캐며 살면서도 시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함에 세상 사람들이 효자, 효부로 칭찬하였다.
戶長公이 1남을 휘 궁진(宮進)이다.
호장공의 행장에 관한 기록은 선원선께와 완산실록에 기술되어 있다.
○ 첨대중찬사(僉隊中贊事) : 정승격의 벼슬
◈ 제 14세 한림공(翰林公) 휘 궁진(宮進)
시조(始祖)로부터 13代 까지는 독자(獨子)로 내려오다가 14세 諱 궁진(宮進) 은 세첩상(世牒上) 최초로 두명의 아들을 두었다.
제1남은 대장군(大將軍) 諱 용부(勇夫)이고, 제2남은 문하시중(文下侍中) 諱 단신(端信으로 시중공파(侍中公派) 파조(派祖)이다. 제14세 궁진(宮進) 벼슬이 한림(翰林)에 이르고, 配位는 장군 李堯의 따님이다.
翰林公이 15歲 때 어떤 분(실명)에게 취학하여 27세 때 文科에 올라 곧 호유궁 교수관(琥琉宮 敎授官)으로 제수 되었다가 왕이 공의 뛰어남을 보고 翰林으로 옮기게 했는데 1년 뒤 모해하는 사람의 참수를 입어 귀양살이를 하다가 돌아가셨다.
한림공의 行狀에 관한 기록은 선원선계와 완산실록에 기술되어 있다.
◈ 제 15세 대장군공(大將軍公) 諱 용부(勇夫)
제 15세 諱 용부(勇夫)는 벼슬이 대장군(大將軍)에 이르고, 配位는 정승 이형(李珩)의 따님이다. 大將軍公이 겨우 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님만 계시니 소인들의 모함으로 3歲 어린이로서 군역(軍役)에 잘못 편입되어 16歲 되는 누이가 대신 정병에 징발 되었고 나중에는 악비장군의 아내가 되었다.
대장군공이 두 아들을 두시니 16歲 때 내시집주(內侍執奏)를 지낸 린(璘)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거(琚)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 전주이씨 평장사공파가 分派 되었다.
대장군공의 행장에 관한 기록은 선원선계 와 완산실록에 기술되어 있다.
○ 평장사 (平章事): 문하성(文下省)의 시중(侍中) 다음 벼슬로 부총리 격의 높은 벼슬
◈ 제 16세 내시 집주공(內侍執奏公) 諱 린(璘)
제 16歲 휘 린(璘)의 벼슬이 내시집주(內侍執奏)에 이르고 配位 는 시중 충숙공(侍中忠肅公) 南平 문극겸(文克謙)의 따님이다.
執奏公이 장성함에 무예가 극히 교묘하여 40步 밖의 버들잎을 쏘아 맞추지 못하는 때가 없었다.
그 당시 군법에 의하면 싸움터에서 한번 싸우다가 패배하면 극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미상 연대에 있었던 싸움터에서 공이 실수하여 패배함에 왕이 법대로 형벌하려 3공 에게 물었을 때 부의대부(副議大夫) 황후의(黃後議)가 아뢰기를 "璘의 무예가 이같이 훌륭하되 아직 때가 되지 못한 탓인가" 하나이다.했다.
왕이 이 대답을 이상하게 여기며 다시 황후의(黃後議) 에게 묻자 황후의가 대답하기를 "신이 일찍이 기대극(奇大極)에게 물어보니 大極이 대답하기를 고려가 망하면 王이 될 姓氏는 반드시 完山李氏라 하더이다." 했다. 이에 왕이 大極을 잡아다
문초하며 "어찌하여 李氏가 왕이 될 줄 아느냐" 하고 묻자 大極은 "신이 완산부 기린산맥을 답사할 때 저 이린(李璘)의 선조 산소를 살펴본 즉 틀림없는 왕흥의 자리더이다." 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왕이 그 무덤을 파헤쳐 버리고자 하거늘 大極이 아뢰기를 "자고로어느 나라 제왕이든 姓을 바꾸어 서로 나아감은 원래 하늘의 명령인 것이며 전날 김지원이 그 산소를 이장(移葬)하려 하다가 그냥 벼락을 맞아 죽었거늘 하물며 파헤치려 하십니까?
대왕은 그런 생각을 거두소서" 라고 간(諫)하는 동시에 또 "편목(編目)이란 책에 이르기를 木子가 羊에 걸터앉는다" 하였는바 임년(壬年:태조 황제께서 개국 하신 해) 도 멀지 않으니 자못 염려되는 바이오" 하였다. 이에 왕이 지관(地官:풍수)에게 명하여 기린산맥을 살펴보고 오라 하였더니 지관이 돌아와 왕에게 복명하기를 "기린산맥을 살펴본즉 자손이 영체하고 곤궁하여 별다른 흥왕지지(興王之地)가 아니더이다." 했다.
이에 왕이 이르기를"그렇다면 大極은 어찌하여 이런 허황한 말을 하였는고?" 하고 물으니 大極이 대답하기를 "해좌사향(亥坐巳向)이니 여러 용(龍)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세이니 天命이 반드시 돌아갈 영험이어든 하물며 금강산 脈이 멀리로부터 와서 그 용세가 水勢와 더불어 부합되어 용이 九五(王位의 효상) 자리에 펴고 있으니 그 하늘의 은덕이 반드시 어양(魚羊:李鮮)으로 내려온다 함이 분명하지 않는가" 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린(璘)의가족을 죽이려 하다가 길성에 모조리 귀양 보내고 역사 300여명을 보내어 기린산 분묘를 파헤치려다 모두 벼락 맞아 죽었다.
이에 왕이 탄식하며 " 이는 하늘의 뜻이라 인력으로 될 일이 아니다 라고 그만 두었다. 부인 문씨가 3歲의 어린 아들을 안고 구사일생으로 유배지 길성 땅에 당도하였으나 그때 마침 오랑캐 난리와 흉년을 맞아 살아갈 길이 막연하고 또한 대간(大諫)의 가혹한 탄핵으로 인해 다시 더 북쪽인 경산(慶山) 땅으로 유배되니 수년동안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다.
그러다가 이윽고 안남(安南)으로 유배되어 재생의 활로를얻게 된다.
집주(執奏) 공이 1남을 두시니 諱 양무(陽茂)이다. 집주공의 行狀에 관한 기록은 선원선계와 완산실록에 기술되어 있다.
○ 내시집주(內侍執奏): 내시란 고려시대 內侍府 속해서 숙위(宿衛) 와 근시(近侍)의 일을 맡아보던 관원이고 집주란 추밀원에 예속되어 있던 관직
○ 경산(慶山): 지금의 경성(鏡城)지방
○ 안남(安南): 경기도 부평, 전북의 고호, 전주의 옛 이름중에 하나로 추정
◈ 제 17세 장군공(將軍公) 諱 양무(陽茂)
제 17세 諱 양무(陽茂)는 유배 등의 파란곡절 속에서도 천신만고로 성장하여 세파를 두루 거치면서 무예를 익혀 고려장군이 되였고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과 혼인하여 안사(安社), 영필(英弼), 영밀(英謐), 영습(英襲), 4명의 아들을 두시니 맏아들이 목조(穆祖)이고, 넷째 아들이 주부동정(主簿同正) 벼슬을 하여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파조(派祖) 이시다.
장군공은 1231년 고려 고종18년 신묘 5월에 돌아가셨으며 묘(墓)는 강원도 삼척군 미로면 활기동 노동산 신좌을향(辛坐乙向)에 자리한다.
1899년 광무 3년 4월 16일에 산소의이름을 높여 준경묘(濬慶墓)라 하고 매년 4월 20일에 제향(祭享)을 모신다. 배위(配位)는 상장군 강제의 따님으로 묘소는 강원도 미로면 동산리 묘좌서향(卯坐酉向 이며 1899년 광무 3년 4월 16일에 산소의 이름을 높여 영경묘(永慶墓)로 하고 매년 4월 20일에 제향(祭香) 모신다.
장군공의 행장에 관한 기록은 선원선계 및 완산실록, 준경묘 비음기(碑陰記) 장군공의 妣位, 영경묘 비음기, 노동, 동산 두 묘소기 등에 기술되어 있다.
注 : 우리 전주이씨 종현들이 선조 유적지를 탐방할 때 준경묘와 영경묘를 첫 번째 답사 코스로 하고 있다 그 연유는 우리 보첩에 첫 번째로 유체를 모신 선조 산소이며
산소자리가 천하에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고, 목조대왕께서 아버님 휘 양무를 이곳 명당에 모시기 위한 과정이 지금도 우리 후손들에게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명당에 산소를 모신 덕에 우리 전주이씨가 조선을 개국하여 500여년의 왕통을 이어올 수 있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후 이곳을 참배할 때 참고하기 위해 그 내용을 정리하여 준경묘, 영경묘, 목조대왕기사(穆祖大王記事)를수록 함.
◈ 장군공 휘 陽茂 준경묘(濬慶墓)
준경묘(濬慶墓)란 태조 고황제의 5代祖 이고 목조대왕의 아버지 이신 장군공 휘 양무의 묘소를 말한다.
강원도 삼척군 미로면 활기리 노동산(蘆洞山)에 申坐 乙向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1899년 고종 36년에 황제께서 친히 비문을 지으시고 비를 세웠다.
◈ 비각(碑閣)
준경묘 비각은 준경묘와 영경묘 사이에 양묘의 재실과 함께 장군공 휘 양무의 구기유지비각(舊基遺趾碑閣)이 세워져 있다. 이 구기유지비각은 고종 황제가 표석과 지단을 세웠는데 현재 삼척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영경묘(永慶墓)
영경묘는 장군공 휘 양무(陽茂)의 配位 李氏의 묘소로 강원도 삼척군 미로면 동산리에 卯坐 酉向으로 계신다.
◈ 비각(碑閣)과 일자각(一字閣)
영경묘의 비각(碑閣)과 일자각(一字閣)은 묘소 앞이 너무 급경사여서 왼쪽(靑龍)에 건립하였다.
◈ 비음기(碑陰記 ) (고종황제 어제)
목조대왕의 皇 考이신 장군공 휘 양무의(陽茂)배위 李氏의 영경묘 비갈은 고종 황제의 어제, 어필 비음기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