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창대군파의 직계 선원선조 행장(시조 18세~20세)

       

    아버지 이신 御 諱 춘(椿)을 도조대왕(度祖大王) 

    할아버지  御 諱 행리(行里)를 익조대왕(翼祖大王)

    증조할아버지  御 諱 안사(安社)를 목조대왕(穆祖大王)에 추존 하셨다.

     

     

     제 18세 목조대왕(穆祖大王) 御 諱 안사(安社)

     

    목조(穆祖)는 목조인문성목대왕(穆祖仁文聖穆大王)이고 諱는 안사(安社)이다. 고려조 때 벼슬이 지선주(知宣州)에 이르고 元 나라로 건너가 벼슬이 남경오천호소(五千戶所) 장관(다루하치 : 達魯花赤)을 지냈다.

    목조는 성품이 온후하고 또 호방(豪放)한 武人 기질이 있어 말 잘 타고 활쏘기를 잘 하였으며 사냥을 좋아했다.

     

    목조는 전주의 지주사(知州事)로 어떤 산성별감(山城別監)이 고을에 오자 지주사가 이를 대접한다는 구실로 목조가 아끼는 관기(官妓)를 억지로 수청을 들게 하자, 호걸풍의 목조가 매우 노여워했는데 지주사 또한 목조의 일가를 해치려고 선조묘역의 흥왕정기설(興王精氣設)과 관련시키며 박해 내지 멸족을 시키려 함으로 일가는 물론 연척까지 목조를 따르는 170여 가구 모두를 데리고 전주로부터 머나먼 강원도 삼척으로 집단 이주를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인망이 두텁던 목조와 그 추종자들은 고난 끝에 동해안의 삼척 고을에서 마을을 개척하며 삶을 정착시켰을 때 전주의 지주사였던 자가 이번에는 관동 일대의 안렴사(安廉使)로 부임했다.

    이에 목조는 부랴부랴 짐을 꾸려 또 한차례 고난의 길을 떠나 두 번째로 함경도 덕원 남면 용주리(익조대왕의 탄생지)로 이거했다. 이때 또 따라 나선 이가 170여 가구였다.

    함경도 덕원 땅에서 정착할 터전을 닦고 거주하든 목조는 또 조정으로 부터 어떤 박해를 받지 않을까 염려하여 일가와 무리의 安身을 위하여 당시 만주와 중국 천하를 지배하든 元나라로 귀화 했다.

     

    그리고 고려 관원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원나라 지경으로 다시 이주하니 이번에는 두만강 유역의 알동(斡東 : 알뚱) 지방이다. 이에 元나라에서는 백성들에게 인망이 있고 담력이 훌륭한 목조를 환영하여 五千戶所의 달로화적(達魯花赤)에 임명하였다. 이로서 목조는 자기를 모해하려는 고려 관부의 영향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원나라의 지방관원으로 신분을 보장받게 되었다. 목조는 경흥(慶興)에서 30리 되는 알동에서 살면서 한족(韓族)을 모아 거느린 다루가치로서 웅거하였으며 그 세가 상당하였고 인근 두만강 건너의 여진족(女眞族) 들과도 우호적으로 지내면서 예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목조가 전주에서 삼척 활기동으로 이사 한 후 1년 남짓 지난 고려 고종18년(1231년) 신묘 5월에 先考의 상사(喪事)를 당해 노동(盧洞)에 장사 지냈고 또 아버지와 어머니의 喪을 당해 동산(東山)에 장사 지냈다.고려 원종 15년(1247) 3월에 승하하시어 처음에는 慶興 城南에 모셨으나 태종 10년(1410)에 함흥 서북 가평산(加平山)에 계좌(癸坐)로 모셔 표석을 세우니 大王의 릉호(陵號)는 덕릉(德陵)이다. 대왕의 신위(神位)는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 正中 제1室에 봉안되어 있다.

     

    配位 효공황후(추존)는 이씨로 관적(貫籍)은 평창이며, 고려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를 지낸 공숙(公肅)의 따님으로 전주 태생으로 추측되나 생,졸,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5월 15일에 승하하여 목조대왕과 같은 산언덕에 모셨으니 陵호는 안릉(安陵)이다.

     

    ○ 덕릉괴 안릉 소재지 : 함남 신광군(선원강요에는 신흥군) 가평면 릉리이다.

    또한 신위(神位)는 宗廟의 永寧殿 제 1室에 봉안되어 있다. 태조 고 황제(이성계)께서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는 甲戌年(1394) 11월 6일에 목조대왕 으로 추존하고 비위는 태조 원년(1392) 7월 28일에 효비(孝妃)로 추존 하였으나 태종(太宗))께서는 존호를 드높여 목조대왕을 인문성목(仁文聖穆)이라 하였고 비위는 孝恭이라 하였다.

    광무 3년(1899) 기해 11월 27일 강원도 삼척 활기동에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趾)” 라 여덟자를 친필로 새긴 빗돌을 세우고 비각을 지었으며 광무 4년(1900) 1월 28일에는 전주 자만동에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趾)” 라 친필로 새긴 비와 비각을 세웠다.

    대왕께서 6남을 두시니 제1남 안천대군 휘 於仙, 제2남 안원대군 휘 珍 제3남은 안풍대군 휘 精, 제4남은 익조대왕 휘 行里, 제5남은 안창대군 휘 梅拂, 제6남은 안흥대군 휘 구수(球壽)이다.목조대왕의 忌日은 3월10일 이고 목조 황비의 忌日은 5월 15일 이다.

    목조대왕 어휘 안사와 配位에 관한 行狀은 선원선계(璿源先系), 완산실록(完山實錄), 관북릉지(關北陵誌), 동북면 제릉영사지기(東北面 諸陵塋四至記), 추존 네 왕의 옛 터전 유적 사왕구기 유적(四王舊基 遺蹟),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 舊居遺趾碑), 활기동 비음기(㓉耆洞 碑陰記), 목조대왕기사(穆祖大王記事), 목조 대왕고실(穆祖大王故實), 목조인문성목대왕 추숭책문(穆祖人文聖穆大王 追崇冊文), 덕릉표석음기(德陵表石陰記), 안릉표석음기(安陵表石陰記), 오목대 비음기(悟木臺 碑陰記) 등에 기술되어 있다.

     

    지주사(知州事) : 목사와 같은데 직급은 못 미치는 사람이 그 직임을 수행할 때 붙이는 명칭

    안렴사(安廉使) : 절도사 또는 관찰사와 같은 지방 장관

    목(穆) : 덕을 펴고 의를 잡는 것을 뜻함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 千后衛 라고도 하고 장사는 종 4품직

    달로화적(達魯花赤) : 다루가치 鎭守者 斷事官 지방 등으로 번역되는 몽고의 관직으로 점령지를 맡은 목민관과 피 지배국에 파견하는 감독관의 두 가지가 있다.

    영녕전(永寧殿) : 종묘 정전 서쪽에 위치한 종묘의 別廟로서 桃廟라고도 한다. 永寧이란 祖宗과 자손이 함께 평안이 있다는 뜻이다. 현재 도천(桃遷)된 神主가 16실에 봉안되어 있다.

     

     

     제 19세 익조대왕(翼祖大王) 御 諱 행리(行里)

     

    익조(翼祖)는 강혜성익대왕(康惠聖翼大王) 휘 행리(行里)이다.

    익조는 목조대왕 御 諱 안사(安社)의 여섯 아들 중 넷째 아들로서 덕원적전사(德源赤田社) 땅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용력이 뛰어 나시고 무예가 특이하여 아버지 업을 이어 알동에서 元의 5천호소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승습한 것으로 보아 여러 아들 중 가장 출중한 듯하다. 익조는 알동에서 경흥 땅의 송두등리(宋頭登里)로 이거 했는데

    이는 본국의 조정이나 관부로 부터가 아니라, 여진족 추장들과의 불화나 어떤 틈으로 후환을 피하기 위하여 이거 했을 것으로 본다.

    이는 아버지 목조의 후덕에 이어 익조 또한 인망으로 무리의 추앙을 받으니 차츰 그 세가 커져서 여진 제천호(諸千戶)의 수하 사람들까지 휘하로 들어옴에 여진의 추장들이 이를 시기하고 두려워하여 위계를 꾸며 모해하려 하고, 또 여러 추장이 합심하여 공격해 왔기 때문에 익조는 이를 간신히 피해 두만강 하류의 적도(赤島)로 권속을 데리고 피신해 들어가 한동안 토막(陶穴)을 짓고 살았다.

     

    그러나 좁은 적도의 섬에서는 많은 무리가 살수도 없고 또 여진족의 위해에 대처할 수도 없어 부친이 전일에 잡았던 터전인 덕원부(德源府) 남쪽 10리 밖의 적전사(赤田社:옛 이름은 용주리) 땅으로 일족을 거느리고 돌아옴에 그를 따른 경흥 백성들이 많이 뒤 쫒아와 모여 살았다.

     

    익조께서 9월 10일에 승하 하시니 함남 안변군 단곡면 릉리(安邊郡 端谷面 陵里) 壬坐로 장례를 모셨다. 신위(神位)는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 정중(正中) 제 2室에 봉안되어 있다.

     

    태조께서 왕위에 올라 익조대왕으로 추존하시고 릉호를 지릉(智陵)이라 하였으며 태종께서 존호를 드높여 강혜성익(康惠聖翼) 이라 했다. 配位는 정숙왕후(貞淑王后) 崔氏로 관적(貫籍)은 등주(登州)이며 고려 戶長 최기열(崔基烈)의 따님이다.

    정숙왕후 탄생, 성장지는 함경도로 추측되며 생. 졸. 연대는 미상이다. 태조 원년(1392)에 정비로 추존하고 릉호를 숙릉(淑陵) 이라 했으며 태종께서 존호를 드높여 정숙왕후라 하였고 神位는 종묘의 영녕전 정중 제 2실에 봉안 되어 있다. 릉소는 건위(乾位) 익조의 智陵 과는 따로 함경남도 문천군 동초면 릉전리에 있는 숙릉이다.( 원강요 에는 문천면)

     

    대왕과 왕후께서 8남 1녀를 두시니, 장남이 함령대군(咸寧大君) 諱 안(安) 차남은 함창대군(咸昌大君) 諱 장(長)이며, 3남은 함원대군(咸原大君) 諱 송(宋) 또는 松이고, 4남은 度祖대왕(추존) 諱 춘(椿), 5남은 함천대군(咸川大君) 諱 원(源)이며, 6남은 함릉대군(咸陵大君) 諱) 고태(古泰)이며, 제7남은 함양대군(咸陽大君) 諱 전(琠), 8남은 함성대군(咸城大君) 諱 응거(應巨)이고 1녀는 안의공주(安懿公主)로써 안변(安邊)에 사는 贈 좌군도통제(左軍都統制) 주단(朱端)에게 시집 가셨다.

     

    익조대왕 어 휘 行里와 配位에 관한 行狀은 선원선계(璿源先系), 완산실록(完山實錄), 관북릉전지(關北陵殿誌), 동북면 제릉영사지기(東北面 諸릉영사지기) 추존 4왕의 옛 터전 유적 사왕구기유적(四王舊基 遺蹟),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익조대왕기사(翼祖大王記事), 익조대왕사적(翼祖大王事蹟), 익조강혜성 익조대왕 추숭책문(翼祖康惠聖翼大王 追崇冊文), 숙릉표석음기(淑陵表石陰記), 지릉표석음기(智陵表石陰記), 익조대왕기적비(翼祖大王紀績碑), 경흥적도기적비명(慶興赤島紀績碑銘), 덕원부적전사 기적비명(德源府赤田社紀績碑銘)에 기술되어 있다.

     

     

     제 20세 도조대왕(度祖大王) 御 諱 춘(椿)

     

    도조(度祖)는 공의성도대왕(恭毅聖度大王) 諱 춘(椿:초 휘 는 善來이다) 익조대왕(翼祖大王)의 여덟 아들 중 넷째 아들로 함흥 송두등리(松頭等里)에서 탄강하셨다.

    도조는 젊어서 경흥 땅 망덕산(望德山) 밑에 살면서 적지(赤池)의 흑용(黑龍)을 쏘아 죽였다 하니 함흥 경흥에서 두만강변의 경흥을 왕래하면서 사신 것으로 보인다.

    또 경산(慶山:경흥) 땅을 여행했는데 녹둔도(鹿芚島)로 가는 日本 사자(使者)를 도중에서 만나 그로부터 황망한 용손(龍孫)의 예우를 받았다 했으니 이를 뒷받침한 것이다.

     

    도조대왕의 초명은 선래이고 또 몽고식 이름은 학안첩목아(學顔帖木兒)이다 고려 충혜왕(忠惠王) 2년 임신(1342) 7월 24일에 승하 하시니 함흥 운전사(雲田社) 壬坐에 장례를 지내고 고려조에서 贈 찬성사(贊成社) 했다.

    태조 즉위 3년 갑술(1394) 11월 6일에 度王으로 추존하시고 태종이 추가해서 號를 공의성도(恭毅聖度)라 추존했다. 대왕의 陵은 의릉(義陵)으로 함남 흥남시 운흥리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表石이 있으며 忌日은 7월 24일이다.

     

    配位 경순왕후는 朴氏로써 籍은 文州이고 元나라 때 千戶벼슬을 하고 안변부원군(安邊府院君)에 추봉된 박한보(朴閑甫)의 따님이시니 고려 충혜왕 3년(1342) 壬午 7월 23일에 승하했다.

    神位는 宗廟 영녕전 정중 제 3室에 봉안되어 있고 陵 所는 순릉(純陵)으로 함남 함흥시 마전리 壬坐 丙向으로 도조의 의릉과 같은 市의 다른 里에 있으며 表石이 있다.

    경순왕후의 忌日은 7월 23일 이다. 태조 즉위 3년 갑술(1394) 11월 6일에 경비(敬妃)로 추존하시고 태종이 추가해서 경순(敬順)이라 하시였다.

     

    대왕께서 5남 3녀를 두시니 장남은 완창대군(完昌大君) 諱 자흥(子興)이고 차남은 환조대왕(桓祖大王) 諱 자춘(子春)이며 3남은 완원대군(完原大君) 諱 자선(子宣), 4남은 완천대군(完川大君) 諱 평(平)이며, 5남은 완성대군(完城大君) 諱 종(宗)이다.

     

    3女 중 1녀 문혜공주(文惠公主)는 대장군 문인영(文仁永)에게 下嫁하고 2녀 문숙공주는 5千戶 김마분(金馬粉)에게 下嫁하고 3녀 문의공주(文懿公主)는 허중(許重)에게 下嫁했다. 度祖大王 어 諱 椿과 配位에 관한 行狀은 선원선계(璿源先系), 완산실록(完山實錄), 관북릉전지(關北陵殿誌), 동북면 제릉영사지기(東北面 諸릉영사지기추존 4왕의 옛터전 유적 사왕구기유적(四王舊基 遺蹟),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도조대왕기사(度祖大王記事), 도조대왕기적(度祖大王記蹟 도조공의성도도조대왕 추숭책문(度祖恭毅聖度度祖大王 追崇冊文), 의릉표석음기(義陵表石陰記), 순릉표석음기(純陵表石陰記), 경흥부적지기적비명(慶興府赤池紀蹟碑銘) 幷序, 경흥부적지도조대왕기적비(慶興府赤池度祖大王記蹟碑) 등에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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