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 연원

     

    서(序)

     

    우리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신라(新羅) 사공공(司空公) 휘(諱) 한(翰)을 시조(始祖)로 모신 성씨(姓氏)이다.

    우리 시조할아버지 사공공 휘 한(翰)의 호(號)는 견성(甄城)이며 야사(野史)에 의하면 시조 휘 한(翰)께서는 원래 중국(中國)사람으로서 15세(歲)때 한림원(翰林院)에 들어 가셨다가 18세 때 바다를 건너 신라국(新羅國)으로 들어와 20세 때 사공(司空) 벼슬에 오르셨다.

     

    견성(甄城) :시조공의 호(號)는 견성이다. 호는 예나 지금이나 보통 고향을 따서 짓는 경우가 많다 원래 지명은 관방(關防) 상 통상적으로 천(川) 산(山) 성(城)을 끝자에 넣는 경우가 많다.

    견성이란 후백제 건국자인 견훤(甄萱)의 도성(都城)이라는 의미며 전주의 별칭이다. 우리 전주이씨는 신라 사공공 휘 한(翰)을 시조로 모시고 40여대(代) 1,300여 년이나 되는 역사 깊은 씨족(氏族)으로 123파(派)의 대군(大君) 군(君)의 후손(後孫)들 400여만명이 각처에 산재(散在)하여 살고 있는 대족(大族)이다.

     

    전주(全州)는 전라북도 도청 소재지로써, 미륵산, 기린봉(麒麟峰), 북방산, 고덕산(高德山), 완산(完山)등으로 둘려 쌓여 북서쪽으로 시원히 뻗은 곳에 위치해 있는 교육, 문화 도시로써 아늑하고 온화한 도시이며, 동남방으로 70리쯤 관촌(館村)을 분수령(分水嶺)으로 전주천(川)이 서북쪽으로 완만히 흐르고 있다. 남녘(南域) 고을들이 다 그렇듯이 전주도 산세(山勢)가 험(險)하지 않고 순한 탓인지 사람들도 인심(人心)이 후(厚)한 편이다.

     

    전주(全州)는 본래 백제(百濟)의 완산(完山)으로, 신라진흥왕 16년(555년)에 완산주를 두었다가 진흥왕 26년(565년)에 주를 폐하고 문왕 때에 또 완산주를 두었다. 경덕왕15년(756년)에 전주로 고쳤고 효공왕 때에는 견훤이 여기에 도읍하여 후백제(後百濟)로 하였다.

     

    고려태조(高麗太祖) 19년(936년)에 후백제의 신검(神劍)을 토평(討平)하여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고쳤다가 고려태조 22년(939년)에 다시 전주로 고쳤다. 성종(成宗) 12년(993년)에 이 고을을 다스리는 벼슬 이름을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라 칭(稱)하고 성종14년(995)에는 12고을을 두고 군(軍)의 명칭을 순의군(順義軍)이라 했으며 전주를 강남도에 속하게 하였다.

     

    현종(顯宗) 9년(1018년)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올렸다가 후에 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공민왕 4년(1355년)에는 원(元)나라의 사신(使臣) 야사불화를 잡아 가둔 사건으로 지위를 낮추어 부곡(部曲)으로 했다가 공민왕 5년 (1356년)에 완산부(完山府)로 다시 고치고 이태조(李太祖) 원년(1392년)에 임금의 조상(祖上)이 나신 고장이라 하여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올렸다가 태종(太宗) 3년(1403년)에 다시 전주(全州)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서(古書)에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완산이씨(完山李氏)로 기록된 문헌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전주(全州)의 옛 이름이 완산(完山)이기 때문이다.

     

    -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 고려 때부터 설치한 지방최고 행정기관

    - 부곡

    - 하급 행정기관

     

     

     이씨(李氏)의 유래(由來)와 전주이씨

     

    중국 상고시대인 순(舜) 임금시절 후직(后稷)의 고요(皐陶)가 이관(理官)이 되고 그의 2남 은성(恩成) 역시 이관(理官)이 되었으므로 은성의 아들이 성(姓)을 이(理)라고 하였다.

    그 후손 중에 이득전(理得全)이 있어 理(리)와 음이 같은 이(李)로 고쳐 쓴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이씨(李氏)는 451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546본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이들이 분관(分貫) 또는 개관(改貫)과 통합(統合과정을 거쳐 현재는 약 230여개 본(本) 만이 남아있다.

     

    이중 시조(始祖)와 세계(世系)가 확실한 것이 130여본, 문적(文籍)을 잊어버려 그 뿌리를 알 수 없는 경우가 100여 本으로 추정된다. 성 씨는 국내에서 자생한 고유성과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귀화성 또는 외래성(外來姓)이 있다.

     

    이씨 고유성으로는 경주의 표암공 이알천의 경주이씨(慶州李氏) 고구려 영양왕 때의 태학박사 이문진 (李文眞)의 후손을 자처하는 익산이씨 (益山李氏). 신라 말 성주장군 이총언(李悤言)을 시조로 하는 벽진이씨(碧珍李氏) 고려 초 호장 출신인 이순유(李純由)의 성주이씨(星州李氏), 이당(李唐)을 시조로 하는 광주이씨(廣州李氏),

    이윤경(李允卿)을 시조로 하는 한산이씨(韓山李氏) 고려말 현리로 생원에 급제한 이석(李碩)을 시조로 하는 진보이씨(眞寶李氏), 왕건을 도와 후 삼국통일에 공헌한 이도(李棹)의 전의이씨(全義李氏. 禮安李氏) 고려 충열왕 때의 이승휴(李承休)를 시조로 하는 가리이씨(加利李氏), 고려 고종때 중량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를 시조로 하는 덕수이씨 (德水李氏) 등이 있으며,

     

    경주이씨에서 분관(分貫)한 덕은이씨(德恩李氏, 본래는 진위이씨), 아산이씨(牙山李氏), 우계이씨(羽溪李氏), 울산이씨(蔚山李氏), 신(新) 원주이씨, 장수이씨(長水李氏), 재령이씨(載寧李氏), 진위이씨(振威李氏). 진주이씨(晉州李氏), 차성이씨(車城李氏, 기장), 합천이씨(陜川李氏) 등이 있다.

     

    귀화성(歸化姓)으로는 당(唐) 나라 때 건너온 성씨로는 백제를 침공한 소정방(蘇定方)을 수행한 중랑장 이무(李茂)를 시조로 하는 연안이씨(延安李氏), 이황(李璜)을 시조로 하는 고성이씨(固城.鐵城李氏), 이귀지(李貴芝)를 시조로 하는 태원이씨(太原李氏), 임진왜란 때 동정군 사령관 이여송의 3남으로 이천충(李天忠)을 중시조로 하는 농서이씨(隴西李氏) 등이 있으며, 고려 고종 때

    월남에서 표류해온 월남 왕실 후예인 이용상(李龍祥)을 시조로 하는 화산이씨(花山李氏), 여진에서 귀화한 태조 고황제의 의제(義第) 이지란(李芝蘭)을 시조로 하는 청해이씨(靑海李氏), 서역의 화굴인(아라비아 계통)으로 고려 말에 동래한 이현(李玄)을 시조로 하는 임천이씨(林川李氏)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충북 괴산군에 거주하는 이씨는 고려 때 일본계 투화성씨(投化姓氏) 라고 하였고 고려 때 거란에서 귀화한 자 중에는 한족의 성씨인 이씨로 바꾸어 귀화한자가 있으며,

    원(元)나라는 제주도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목호 300여명을 보내어 말을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들은 나중에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제주도에 정착하였다. 이들 중 원 나라를 본관으로 하는 10여개의 성씨 중에는 이씨도 있었다고 고려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귀화 성씨를 나라별로 분류해보면 중국, 한족, 원나라, 몽고족, 서역인(희굴인, 아라비아 계통) 거란족, 여진족, 일본족 등이 있다.

     

     

     전주 이씨의 유래

     

    전주 이씨의 기원

     

    전주이씨의 시조 휘(諱) 이전의 선계(先系)는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몇가지 주장이 있다. 어느 씨족이나 시조의 생애는 설화와 전설에 쌓여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그 연원이 불명 할수록 신비롭게 윤색 되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자신의 성씨를 타 성씨보다 우월화하기 위하여 신화로 미화시켜 신비로운 존재로 윤색함으로써 자신의 가격(家格)을 높이고자 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전주이씨 기원에 관해서는 대체로 3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중국 당나라에서 건너왔다는 주장

    둘째는 경주이씨에게 분관(分貫) 되었다는 주장

    셋째는 전주 토착 세력의 후예라는 주장이다.

     

    중국에서 왔다는 주장은 완산실록(完山實錄)에 적혀있고 경주이씨 분관설은 경주이씨 세보(世譜)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렇듯 전주이씨 유래에 관하여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우리는 완산실록을 참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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